The Season of the Trench — 참호에서 나온 옷이 100년을 버티는 법
9월이 되면 옷장 앞에서 같은 장면이 반복된다. 여름 옷은 아직 치우기 이르고, 겨울 코트는 꺼내기 이르다. 그 애매한 2주를 건너가게 해주는 옷이 하나 있다. 트렌치코트다.
매년 이맘때 트렌치가 다시 돌아오는 이유가 단순히 날씨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이 옷에는 100년 넘게 사라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
비를 막으려던 두 남자
이야기는 1820년대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된다. 화학자 찰스 매킨토시가 고무를 입힌 방수 원단을 발명했다. ‘매킨토시’라 불린 이 코트는 영국의 비를 막아냈지만 문제가 있었다. 숨을 쉬지 않았고, 냄새가 났다.
1853년, 런던 리젠트 스트리트의 재단사 존 에머리가 더 나은 답을 내놓는다. 통기성이 있으면서 물을 막는 원단이었다. 그는 회사 이름을 라틴어로 바꿨다. 아쿠아스큐텀(Aquascutum) — aqua(물)에 scutum(방패), 물의 방패라는 뜻이다.
그로부터 26년 뒤, 베이싱스토크의 포목상 토머스 버버리가 개버딘(gabardine)을 발명한다. 1879년이었다. 원단을 통째로 코팅하던 기존 방식과 달리, 실 한 올 한 올을 먼저 방수 처리한 뒤 촘촘하게 짜는 방식이었다. 가볍고, 튼튼하고, 냄새가 나지 않았다. 1888년에 특허를 받았다.
이 원단은 곧 극지로 갔다. 1893년 노르웨이 탐험가 프리드쇼프 난센이 북극으로 향하며 개버딘을 입었고, 아문센과 섀클턴이 그 뒤를 이었다.
참호에서 얻은 이름
1901년, 영국 육군성이 버버리에게 요청한다. 기존의 무거운 모직 외투를 대체할 코트를 만들어 달라고.
버버리가 내놓은 답에는 이유가 있는 디테일들이 붙어 있었다. 어깨의 견장(epaulette)은 계급장을 달기 위한 것이었다. 벨트의 D링은 수통이나 지도 케이스 같은 장비를 걸기 위한 고리였다. 가슴의 스톰 플랩은 비를 흘려보내고, 소총을 견착할 때 어깨를 보호하기 위한 덮개였다. 유난히 큰 주머니는 지도를 넣기 위한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의 참호에서 이 코트를 입은 사람은 영국군 장교와 준위뿐이었다. 사병에게는 지급되지 않았다. 병사들은 이 옷을 ‘트렌치 코트’라고 불렀다. 참호(trench)의 코트.
전쟁이 끝나고 장교들은 그 코트를 벗지 않았다. 군복이 사복이 되는 흔치 않은 경로를 거쳐 트렌치는 민간의 옷이 되었다. 1934년에는 버버리가 런던에서 당일 배송을 할 정도로 팔렸다.
왜 아직도 여기 있을까
지금 우리가 입는 트렌치에는 그 기능들이 대부분 필요 없다. 견장에 계급장을 달지 않고, D링에 수통을 걸지 않는다. 그런데 디테일은 그대로 남았다.
기능이 사라졌는데 형태만 남는 경우, 보통 그 옷은 사라진다. 트렌치는 반대였다. 용도를 잃은 디테일이 오히려 이 옷의 얼굴이 되었다.
2026년, 버버리는 창립 170주년을 맞아 개버딘 캡슐 컬렉션을 냈다. 1879년의 원단으로 파카와 봄버, 퀼팅 재킷을 만들고 거기에 견장 같은 트렌치의 요소를 옮겨 붙였다. 옷의 형태는 바뀌었지만 문법은 남은 셈이다.
올가을의 트렌치
이번 시즌에도 트렌치는 여전히 기본값이다. 다만 색이 움직이고 있다. 트렌드 예측가 켄들 베커는 베이지와 탄이 여전히 클래식이지만 네이비와 초콜릿 브라운이 올라오는 중이라고 말한다. 가죽과 스웨이드 디테일도 함께.
더 로우(The Row)가 이번 가을 보여준 방식은 특히 단순했다. 뉴트럴 트렌치, 같은 톤의 타이츠, 포인티드 토 펌프스. 그게 전부다.
지난 봄에는 크롭 트렌치가 많았다. 메종 마르지엘라, 디 아티코, 생 로랑, 버버리까지 허리나 그 위에서 잘라냈다. 반대로 이번 가을 런웨이는 볼륨이 커지는 쪽이다. 로에베와 루이 비통의 코트는 몸의 윤곽을 훨씬 넘어선다.
결국 남는 것
이 옷의 이상한 점은 여기에 있다. 크롭이든 오버사이즈든, 베이지든 초콜릿이든, 우리는 그걸 여전히 트렌치라고 부른다.
참호에서 지도를 넣던 주머니, 계급장을 달던 견장, 총을 받치던 어깨의 덮개. 쓸모를 잃은 그것들이 이 옷을 100년째 알아보게 만든다.
어쩌면 오래 남는 옷은 편해서 남는 게 아니라, 이유가 있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남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유는 잊혀도 형태는 기억된다.

